현대미술-오브제展, 유리섬-맥아트 미술관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지난 10월부터 2025년 2월 2일까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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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작가의 정신과 물질을 일치하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이해, 연구와 기술의 궁리가 필요하다.
아이디어 스케치, 드로잉, 모델링, 재료 탐색과 실험, 기술개발 등이 정신과 물질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탐지하는 과정이다.
작가가 물질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물질이 작가의 사고를 변화시키고 영감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혀 가공하지 않은 물질 혹은 어떤 특수한 처리로 물질이 변화하는 효과가 창작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작가가 인위적인 수단과 제조법을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물질은 고유의 색채와 결 그리고 시각적 촉각성, 빛의 반응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현대미술은 창작보다 발견과 의미 부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재현의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물성은 더욱 중요해졌다. 같은 형상이라도 물성, 이미지가 다르면 다른 의미로 읽는다.
다양한 재료, 매체가 현대미술의 물질이 되고 수용되는 만큼 재료나 수법으로 순수미술과 공예의 범주를 나눌 수도, 필요도 없다.
대부도 유리섬 박물관이 기획한 <현대미술–오브제>전은 도자, 유리, 자개를 시도하는 6명의 작가들의 작업을 한 자리에 모아 현대미술의 새로운 사물성의 세계와 시각 언어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광물계 혹은 생태계에 각자 태생의 근과 물성이 다른 재료들을 각자의 수단으로 가공한 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도자, 유리, 자개, 캔버스 위 아크릴릭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지만 6명 작가들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물성과 빛이라는 시각적 효과, 비물질적 요소를 공유한다.
빛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재료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부드럽고 매끈한 표면에서는 빛이 쏟아져 내리듯 미끄러지기도 하고 입도가 거칠고 굴곡진 표면에서 빛이 꺾이고 스며들고 사라지기도 한다.
재료의 투명도(빛 투과율)에 따라 빛을 많이 혹은 조금 관통하고 반사하기도 하여 다채로운 광택의 스펙트럼과 시각효과가 생성된다.
같은 재료라도 재료의 기법, 변형에 따라 결과가 다르고 여기에 작가의 시도가 더해져 서로 뒤섞이고 의도치 않게 충돌하는 물질의 변성, 시각 언어화를 보는 것은 이 전시의 중요한 의의이자 목적이다.
강형자는 도자로 판타지 소설 속 동화에서 출연할 법한 인체, 동물 등이 등장하는 우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왔다.
네버랜드에서 아이의 상태로 영원히 머물 피터팬처럼 강형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자신의 페르소나들에게 환상적 감정, 상상이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유아기적 세계를 투영한다.
작가의 우화는 미성숙이 충만한 세계다.
문명화되고 성숙한 어른들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때로 유치하기도 한 ‘페르디두르케(Ferdydurke)’적 세계와 닮아있다. 보기와 달리 합리적이지
도 않고 충동적이며 때로 위선적이고 모순적이기까지 한 내면의 어린 아이는 어른의 퇴행(regression)일까? 아니면 실존적 자아의 마주함일까?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아이, 동식물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화려한 색채로 묘사했던 전작과 달리 몸의 구체성을 생략하고 청색 기조 모노톤으로 채색한 캐릭터로 표현의 변화를 주었다.
나이가 들고 사회에 적응하고 성숙하며 어쩔 수 없이 발달 시켜온 어른들의 방어기제, 그 속에 웅크린 무의식 속 작은 어린 아이를 재현하기 위해 이리저리 재료, 형태, 색, 질감, 크기를 바꾸어 서사와 이미지를 구체화하려는 일련의 과정이다.
강희경의 유리 회화 <자연에 살다(Live in Nature)>는 폐유리 혹은 지인들을 통해 얻은 판유리에 그린 회화 시도다.
판유리를 통과한 빛이 벽에 드리울 그림자 환영을 유도하기 위해 만든 거치대 혹은 액자 프레임 역시 폐가구 등에서 얻은 목재를 활용한다.
재료만 보면 전 세계 기후 위기와 팬데믹 등 환경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 생태학적 세계관을 예술적으로 구현하는 생태 미술(Eco Art) 차원으로 오인할 만하다.
그러나 강희경의 유리 회화는 재활용으로 환경보호 메시지를 제시하고 촉구하는 예술운동의 차원이기보다,
작가가 동경하는 자연 친화적 삶에 대한 관조의 기록 혹은 자기 고백적인 일기에 더 가깝다.
콘크리트와 유리로 뒤덮인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가까이 살며 동식물과의 공생이 주는 삶의 평온과 위로, 안정을 추구하는 자의 일상의 기록이다.
새것보다는 외면받고 버려진 재료, 희뿌연 해지고 상처 난 폐유리를 고르는 마음은 작가가 마을 사람들, 식물, 동물을 대하는 마음과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의 공생하는 삶을 위해 한 인간이 행하는 예술적 행위가 소모적이거나 가치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여 찾은 재료, 실천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생태적 행위가 폐유리에 그린 강희경의 회화다.
문이원의 <a black dance-sunset>연작은 오랜 시간 공들여 자개 조각을 잘게 자르고 모자이크하듯 하나씩 패널에 붙인 가상의 자연 풍경이다.
납작한 평면에 자개를 붙여 만든 이미지는 그 어떤 붓질로 그린 풍경과 비견할 수 없는 현란한 일루전을 보여준다.
자개는 자연적 소재다.
인위로는 만들 수 없는 현란한 빛의 변칙과 색채 효과가 시각주체의 시선이 닿는 화면과의 거리, 방향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화려한 광휘와 반짝이는 색채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조개껍질의 무늬와 색채, 물감이나 붓으로는 해낼 수 없는 강한 환영 속에서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가늠해 본다.
그러나 밝은 오색광율 색채와 환영과 달리 산수풍경은 어둡고 스산하다.
짙은 어둠 속에 저들끼리 얽히고 꽉 찬 수풀, 잎사귀가 간주할 만한 모종의 검은 실루엣들이 화면에 난무한다.
필치의 힘에서 무서운 식물의 생장력, 어둠 속에 스러져가는 생명들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에 어울리지 않게 자개 오색 광률의 과한 반짝거림과 영속성이 빛과 어둠을 강하게 대비하여 견주는 화면이다.
이현숙은 벽을 공간으로 삼는 회화의 메커니즘을 벗어나 구성적이고 조각적이며 입체적인 작업으로 다가온다.
우주라는 비가시적 세계를 구형으로 잘라 그 위에 물감을 흘리고, 겹겹이 바르고, 원판을 회전하여 붓질에 속도를 얹는 일련의 그리기 수법의 변용으로 우주의 질서, 역동적인 변화를 매개화한다.
세계의 풍경, 우주의 질서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사는 인간존재의 물음이 색채, 광택, 표면의 밀도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을 보이게 하려고 작가는 화면에 구상적 이미지들을 쌓는 대신 색채를 거듭 쌓고 덮는다.
화면과 눈과의 거리, 조명에 따라 때로는 강물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듯하고 화면이 움찔하는 듯하다.
출현과 소멸이 시각 주체가 움직이거나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의 달라진다.
빛의 반짝거림이 우주 혹은 빛의 자취로서 대자연의 에너지가 시각적으로 환기된다.
그저 판넬 위에 바른 물감이라는 물질, 행위의 결과물인 붓질의 총체에 불과할 뿐인데도 말이다.
유영조의 <선택>, <murmure3> 신체는 덩어리의 결합이다.
속이 빈 크고 작은 유리 덩어리를 불고 배열해 공중에 매달았다.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현실로부터 추방된 위태로운 몸을 연상시킨다.
이 광경이 영화 <그래비티>에서 인간이 무중력 상태에서 느낄 법한 공포인지 속박 없는 자의 자유로움인지 모호하다.
회오리치는 동심원으로 휩쓸려 빨려 들어가며 버둥거리는 발을 보면 자유로움보다는 절체절명의 위험이나 위협을 맞닥트린 자아들의 초상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현실로부터 붕 뜬 존재처럼 늘 신경증적 불안, 공포가 일어난다.
유영조는 불안을 속이 빈, 투명한, 깨지기 쉬운 유리의 물성을 빌려 시각 언어로 일치화하고 있다.
발이 떨어져 있는 몸, 공중에서 빛을 내부까지 온전히 통과시키고 무아레(moiré) 환영 위를 도는 몸은 빛 그리고 방향에 따라 부분적으로 있음과 없음 사이를 오간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신체, 반짝이지만 속이 빈 몸은 우리의 내면 안에 있는 어렴풋한 공포, 불안을 확인시켜 준다.
이우철의 <현대인의 표정>은 언어가 미숙한 아이들이 손짓으로 사물을 가리키거나 흉내 내는 모방 놀이에서 가져왔다.
브로잉 기법으로 얼굴 형상을 만들고 눈, 코, 입, 손 등의 형상을 덧붙여 초상 연작이다.
다다이스트들이 프로이트적인 자동기술법을 빌려 시도한 콜라주, 포토몽타주처럼 우연성, 비논리성, 자동주의와 같은 비이성적인 요소들이 개체마다 많다.
이우철의 얼굴은 괴기스럽기보다 우스꽝스럽다.
풍자와 해학의 정신을 담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인간을 은유한 탈 제작과 조형 문법이 같다.
작가는 말이 아닌 몸으로 소통하는 아이들의 순진무구, 천진난만에 주목하고 이를 밝고 화려한 색채, 가지각색의 다양한 색감, 출렁거리는 곡선 등으로 대유한다.
다양한 얼굴 표정 그리고 손과 소도구를 이용한 비언어적 방식으로 희극적, 우화적 요소를 연출한다.
자세, 몸짓, 표정 등은 예속에 적응하느라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천진함에 대한 동경 또는 본성으로의 회귀를 상징하는 동시에 지혜와 기교가 발달하지 않은 태초의 역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양한 유리 색채의 조합, 그것을 통과한 빛의 물성과 효과는 돌이나 나무를 조각하거나 흙으로 빚어 구운 초상과는 다른 천진무구함, 비언어적 세계의 원초성, 동심으로 바라본 삶의 리얼리티를 가시화한다.
이우철의 초상 연작은 안이 비어 병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예기법이지만, 다양한 색채감각과 해학적 은유는 그의 작업을 조각으로 사유할 충분한 단초를 제공한다.
<홍지수=미술평론, 미술학박사>
김태창 기자 chang49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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