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과학적 존재양식과 문화적 양식

홍승철 | 기사입력 2016/04/18 [09:47]

과학적 존재양식과 문화적 양식

홍승철 | 입력 : 2016/04/18 [09:47]
▲     © 홍승철


 

과학적 존재양식과 문학적 양식

 

문학평론가 하길남

    

우리는 잠시 과학적 연구가 문학적 선택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돌려보면서 과학적 방편에 대한 융합을 시도해 볼까 한다. 과학이론이 문학에 접목될 뿐 아니라, 과학적 존재형식 자체가 수필의 구성 요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양하의 수필  나무 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에 대한 형식을 읽어왔던 것이다. 반숙자가  등나무  형식에서 갈등과 의지를 읽어왔으며, 윤모촌의  오동나무  형식에서 인품과 부덕婦德을, 이유식이나 정호승 시인에서  안개꽃  형식을 보았으며 모성애 등을 읽어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광성 수필가의  수련 꽃 에서 순수와 깨끗함을 읽지 않았던가. 김수영 시인은  풀꽃 에서 서민의 애환을 노래해 왔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저 유명한  대나무  형식에서 절개를 읽고, 우리는 수필형식의 한 표본처럼 느껴온 것이 사실이 아닌가.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 , 김소운의 수필  보리 에서 우리는 자연의 형식을 넘어 그 이미지를 읽게 된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나도향, <그믐달>에서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김소운, <보리>에서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도  과학이란 무엇인가 로 시작되는 강의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미학해설과 에드거 앨런 포의 시집 《유레카》의 과학적 상징성에 관한 문학비평을 곁들이고 있다.  자연과학은 공학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에 가까운 학문이라며 문학, 미술, 음악의 영역을 거침없이 넘나든다 고 적고 있는 것이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겨울날에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거칠 것 없이 비쳐오는 별을 받으면서 나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뚜비 와 함께 눈 위를 거닌다.

─ 유달영, <겨울 정원에서>에서

 

연세대 국문학과 정과리 교수도 다윈의  종의 기원 은 곧 문학의 직계가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의 불완전성은 불행이라기보다 차라리 특권이라고  전제하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볼 이유가 생긴 것 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역시 다윈의 진화론은 문학과 맞닿아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어 그는 “포스트-휴먼의 등장과 더불어 문학적 상상력은 폭발한다. 월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룰 비롯해 우리 인류의 육체적 변화를 맹렬히 탐구하는 작품들로 포화되어 있다. 다른 한편 첨단과학으로 인류를 조작하고 관리하는 생명공학을 경고하고 반성하게 하는 문학도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 모양을 제공한다면, 오늘의 문학은 그 지배체제 자체가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생태에까지 다다른 상황을 자주 그린다. 최근의 화제작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도 얼마간 그런 상황을 반영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곧 사람의 생활 그 일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인간학이 되는 것이다. 수필이 작가 자신을 그리는 것이니,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과학이나, 진화론을 공부한다는 것은 나를 아는 가장 기초적인 관문이 된다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