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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빛바랜 지난날도 그리움이다

안산신문 | 기사입력 2020/11/25 [08:55]

<수필> 빛바랜 지난날도 그리움이다

안산신문 | 입력 : 2020/11/25 [08:55]

 ▲ 오필선 시인/수필가

「대한문학세계」 시 부문 등단

「한국산문」 수필 등단

안산문인협회 사무국장

한국산문 회원

대한문인협회 정원

대한문인협회 경기지부 홍보차장

 

휴대폰 번호 하나를 받았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잊고 지내던 이름 정00. 오랜 만남을 가졌다거나 애틋한 사연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잠깐 호감을 느낀 정도의 학생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후배를 통해 안부를 물어오며 연락처를 전달해 준 것이다. 40년이나 된 까마득한 옛일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났다.

 

나는 고등학교를 인천으로 다녔다. 안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인천, 수원, 안양으로 졸업생 반수 이상이 외지로 진학을 했다. 안산에는 고등학교가 한 곳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후배가 미팅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흔쾌히 약속하고 미팅 장소에 나갈 여섯 명을 선발했다. 토요일 오후 주안사거리에 위치한 뉴욕제과점에서 만났다.

 

남학생 여섯에 여학생 다섯이었다. 한 명이 급한 사정이 생겨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주선자인 내가 빠지기로 하자 후배가 몹시 난처하다는 표정이다. 중학교 후배들인지라 혹시라도 불상사가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짓궂은 남학생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미팅에는 빵값을 내지 않았다. 모두가 작당한 뒤 한 명씩 도망치는 치사한 수법을 쓰던 때였다. 다행히 소지품 교환으로 파트너가 정해졌고 별일 없이 대화가 진행되었다. 파트너가 없는 나는 미팅 장소를 빠져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후배를 송도역에서 만났다. 송도와 수원을 오가는 협궤열차는 세 시간에 한 번씩 하루 네 번을 운행하였기에 마지막 열차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있었던 미팅에 대한 이야기를 종알대는 후배는 파트너에게 관심이 있는 표정이다. 후배 파트너가 된 명호라는 친구는 꽤 입담도 좋고 체구도 훤칠했다. 모처럼 시골을 벗어난 것도 있었겠지만 파트너가 맘에 들었는지 입꼬리가 올라간 후배는 흥분된 표정이 역력했다. 한참을 수다를 떨고 난 뒤 짝을 맞춰주지 못한 미안함에 내 맘에 쏙 드는 친구를 소개해 준다는 약속을 했다. 며칠 후 집으로 찾아온 후배가 마음에 들 거라며 약속 장소와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한창 도시개발이 시작된 안산은 온통 공사장이었다. 지금은 노적봉 인공폭포가 멋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당시에는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도로만 뚫려 있을 때였다.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 언덕을 넘으니 협궤열차가 지나는 철로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교복에 하얀 깃이 유난히도 돋보였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곳,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세 시간 동안은 정적이 머무는 곳이었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멋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쑥스러워 고개만 까딱이고 철로의 침목에 앉았다. 손수건을 꺼내 침목 위에 깔고 나란히 건너편 침목으로 그녀도 앉았다.

 

한동안의 정적을 깬 것은 그녀였다. “선배님, 지난번에 미안했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라며 말을 맺는다. 같은 중학교에 다닌 후배 중에 이런 미인도 있었나 싶어 고개를 들고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녀의 질문에 간신히 대답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다. 그녀가 책을 좋아한다며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란 책을 가방에서 꺼내 들며 추천을 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속한 문학회에서 토론으로 선정된 책이라 이미 읽은 터였다.

 

서로 소통할 이야깃거리는 긴 터널을 순식간에 통과하게 하는 기적을 만든다. 문학으로의 공감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서먹했던 순간은 사라졌다. 책 속의 이야기로 어느새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산을 끼고 돌아 나오는 협궤열차의 기적이 울리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그락거리는 기차 소리가 가까워지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버스에 올랐다. 그녀의 집은 멀지 않은 곳이라 걸어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전령이 된 후배가 전갈(傳喝)을 가져왔다. 기찻길에서 재회하자는 내용이 먼저 눈에 띈다. 쿵쿵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지만, 눈치 빠른 후배의 놀림도 대수롭지 않았다. 단정하게 쓴 편지에는 시화전에 출품했다는 “사과”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 있었다. 기찻길로 그녀를 만나러 갔다. 주안시장을 지나다 빨간 사과가 눈에 들어 제일 고운 것으로 하나를 샀다. 마음보다 더디게 가는 버스 안에서 교복 바지에 사과를 문지른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이는 사과를 보며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가방 속에도 그녀에게 보여줄 답으로 적은 “사과나무”라는 시가 벙글거렸다.

 

오랜 지기처럼 다정한 연인이 되어있었다. 감성이 충만했던 소년과 소녀의 부끄러움은 철길 속으로 빨려들었다. 하얀 갈대의 속살이 흔들릴 때마다 양털 구름이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디뎠다. 가을 단풍이 빨갛게 볼을 붉히고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 책갈피에 꽂는 그녀의 손이 곱다. 평행으로 달리는 철길마저 아스라한 끝에서 만나 미소를 짓는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둘 사이를 기차가 울리는 기적 소리가 깨뜨렸다. 그녀 손에 슬며시 빨간 사과를 쥐어 주며 사과보다 더 빨개진 볼을 감추느라 버스 정거장으로 뛰었다. 잘 가라는 인사도 못 했다.

 

후배가 집으로 찾아왔다. 손에는 그녀가 전해주라는 전갈이 들려 있었다. 몇 마디 말도 없이 두툼한 편지를 주고는 돌아갔다. 후배의 뒷모습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봉투를 열었다. “선배님, 미안합니다. 제가 사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로 시작되는 편지는 이별 통보였다. 그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내 동창이 그녀의 남자 친구였다. 다른 사람을 사귀고 있으면서 나를 만난다는 죄책감에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고맙고, 감사했습니다.”라는 인사말로 편지는 끝이 났다. 하얀 손수건이 정갈하게 봉투 속에 접혀 있었다.

 

짧은 만남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며칠 동안은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뒷모습이 모두 그녀로 보였다. 토요일 오후 그녀를 만났던 철길로 향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곳에 오지 않았을까 기대를 하면서. 따뜻했던 철길이 스산하다. 철길의 평행선은 끝에서도 만나지 않았다. 마지막 기차가 눈으로 들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철길 침목 위에 하얀 손수건을 놓고 돌로 눌러 놓았다. “행복해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마웠다.”라는 쪽지를 넣어 두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그녀는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전화번호를 받아든 머릿속이 복잡했다. 몇 번인가를 전화기에 손을 올려놓고 떼기를 반복했다. 만나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의 청순하고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나를 흔든다. 후배가 은근히 바람을 집어넣는다. “정00이가 선배 어디 사느냐고 묻더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꼭 전화 달라고 했어.”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은근히 그녀가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같은 하늘에서 잘살고 있으면 되는 거지······.’ 헛헛한 웃음이 입가로 번졌다.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정00이와 만났었냐고 묻는다. 베트남에 이민하여 모처럼 한국에 왔었는데 돌아가기 전에 만나주지 그랬냐고 핀잔을 준다. 내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빛바랜 지난날도 그리움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노적봉 인공폭포를 지나는 승용차 차창 너머로 사라져 버린 협궤열차의 철길이 빙긋이 미소를 보낸다. 잘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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