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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 자매의 힐링 여행

장석례 | 기사입력 2020/03/23 [15:44]

<수필>세 자매의 힐링 여행

장석례 | 입력 : 2020/03/23 [15:44]

 

▲ 장석례 수필가
2016년 7월 <한국수필>로 등단사)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회원상담학박사(Ph. D.), 교육학석사(상담심리), 문학석사(국문학)문학심리상담전문가, 독서심리상담전문가

 나이 들어서 가는 여행은 젊은 시절의 느낌과 사뭇 다르다. 활동이 왕성하던 시기에는 새로운 경험을 미래의 삶으로 접목하려는 욕구가 있었는데, 나이든 지금은 부담 없이 즐기면서 심신을 풀어내는 쪽으로 마음이 간다.

 

때론 낯선 여행지를 둘러보는 즐거움보다, 속내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고받는 따뜻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오롯이‘자매들만의 시간’을 갖는데, 주로 어린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가슴에 체증처럼 얹혀있는 아픔들을 풀어놓는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충격으로 어머니가 몸져눕고, 작은집 건넌방에서 온가족이 복닥거리며 살았던 시기는 우리 가족 흑역사의 클라이맥스였다. 큰언니는 서울의 명문 중학교 입학을 포기한 채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해야 했고, 작은언니는 두 살짜리 남동생을 업고 학교에 가야할 때도 있었다.

 

집안 형편이 나아져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에도, 모내기나 벼 베기 날에는 일꾼들 새참 때문에 결석하고, 태풍이 오면 쓰러진 벼에서 싹이 나기 전에 베느라 수업을 건너뛰었다.

십대와 이십대를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채웠던 언니들은, 결혼 후에도 가족들의 행동반경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항상 관심더듬이를 켜고 부모님과 동생들의 안녕을 살폈다.

 

큰언니가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던 날, 방범용 카메라가 사라진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했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보니, 살아온 날보다 남은 시간이 짧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매월 축제가 열리는 지역을 탐방하는데, 특히 꽃 축제가 열리는 곳은 빠지지 않고 다니고 있다. 우리가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년 시절의 그리움과 닿아있다. 동네에서 제일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했을 때, 앞뒤 뜰에는 백합,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국화, 매화가 가득하고, 앵두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복숭아나무가 담장을 둘러 있어 집안에서는 늘 향기가 났었다.

 

얼마 전 우리는 큰언니의 칠순을 맞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나이 든 사람들끼리 가니 가족들의 입과 손이 바빴다. 여권은 준비되었는지, 짐은 잘 쌌는지, 핸드폰 로밍과 환전은 어떻게 할 건지, 점검하고 챙겨주느라 온가족이 분주했다. 가방은 반드시 앞으로 메고, 지갑을 조심하라고 반복적으로 잔소리를 해댈 때는 자녀들에게 했던 잔소리를 그대로 돌려받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여행 전날 밤, 큰언니 집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단다. 차표를 가방에 넣은걸 까맣게 잊은 언니는 손녀가 “할머니 이건 뭐예요?”하니까 영수증인줄 알고 찢어버리라고 했다.

 

아차! 휴지통을 뒤졌더니 잘디잘게 찢은 차표가 나왔고, 가방 싸는 일을 도와주려던 아홉 살 손녀는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손녀는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차표를 붙였고, 차표가 문제될까 걱정이 된 딸과 사위는 이른 아침부터 버스터미널로 달려가야 했다.

 

건강은 확실히 나이순이 아니다. 여섯 살 위인 큰언니는 여행지에서 펄펄 날고, 두 살 위인 작은 언니는 쌩쌩한데, 막내인 나는 비실거리다가 병원신세까지 졌다. 손주 넷을 보살피느라 종종걸음 치는 큰언니나, 식당에서 종일토록 일하는 작은언니는 여행지를 걷는 것쯤은‘새발의 피’로 여겼다. 나의 힘듦은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고, 걷기보다 자동차에 의존했던 습관에서 기인한 것 같다.

 

5일간의 여행에서 우리는 마음가는대로 편안하게, 온전히 몰입하면서, 우리들만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다. 몇날며칠을 붙어 지내는 동안 무장 해제된 감성은 화석화된 이야기들을 녹여냈다. 켜켜이 쌓여있던 이야기들을 가슴이 뻥 뚫리도록 쏟아냈더니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표정은 유리알처럼 맑아졌다.

여행 사진 속에서 세 자매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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