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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단상 - 김 희 삼 (미래창조경영연구원장)

김희삼 | 기사입력 2021/12/22 [12:37]

주말 단상 - 김 희 삼 (미래창조경영연구원장)

김희삼 | 입력 : 2021/12/22 [12:37]

 

 

 ▲ 김희삼/ 안산시민

 

코로나19로 편치는 않았지만 주말을 핑계 삼아 파주 문산 일대를 다녀왔다. 인근에 있는 황희 정승 기념관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태종이 양녕을 세자에서 내리고 충녕을 세우자 황희가 반대했다. 한번 정한 상속을 변경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자 태종은 그를 전라도 남원으로 귀양보낸다. 그랬던 황희를 다시 불러들이는데 능력과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00년 조선 왕조의 일등 재상이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황희를 재 발탁한 ‘이방원의 판단’이 옳았다고 증거한다.

 

태종은 세째 충녕(세종)의 됨됨이도 알아보고 방촌 황희도 끝내 내치지 아니하고 그래서 정적이었던 두 사람을 손잡게 했는데 왈 용인술이다. 그래서 세종과 황희가 콜라보하여 치적과 태평성대가 가능했고 그 결과 성군과 현신이 되었다는 것. 이런 용인술이 어찌 조선 왕조에만 통했겠는가. 동서의 지역에 다름이 없고 고금의 시공에 걸쳐있는 이치이리라.

 

세월이 흘러 90세 황희가 육신을 상여에 누이고 먼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 임금은 신하의 장례에 문상하지 않는 법, 그래도 문종은 교하 강변까지 나와 스승 황희의 휘날리는 만장을 보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보고 망자 된 황희가 여봐라 잠시 멈추어라 했을 언덕, 그곳에서 북망산천 나그네 길 마지막 어전 배알을 했을 것이다. 그 언덕은 그가 현역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던 지점, 후세 사람들은 그곳에다 위패 하나와 영정 한 장을 모셨으니 오늘 우리가 지나온 기념관 자리다.

 

그에 관한 일화는 열 손가락에 넘친다. 우리가 다 아는 “허허, 그렇다면 부인 말도 맞소”라는 이야기는 황희 하면 떠오르는 단골 메뉴다. 언년이와 사월이의 싸움을 말리면서 했다는 이 이야기를 사람들은 황희가 온후하고 현명한 인품을 가졌다고 설명하면서 후세에 전달했다. 우유했던 성격으로 봐서 그랬을 것도 같지만 그러나 도둑이 와도 훔쳐갈 물건이 없어서 개를 기르지 않았다는 소문은 다소 부풀려진 듯하다. 사실이라 해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사족같은 단견 하나, 사람이 본디 갖고 있는 포텐셜이 으뜸으로 중요한 것은 맞지만 누구에 의해서 발탁되고 캐스팅되어 세상에 나와 엮여가느냐가 중요하고 조석 성찬의 퀄리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오늘 황희 소년의 데뷰와 위기, 활약 과정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깨닫게 되는데 살짝 억측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반구정 근처에서 남쪽의 최북단 땅도 밟아보았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70년이 되었고 지금은 휴전 상태다. 이 땅에서 총알이 오고 간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세상은 평화롭고 산허리는 향기롭다. 서울 북한산이 눈에 보이고 개성도 부근에 있으며 그 가까운 남북의 하늘을 새들은 자유로이 비상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동족상잔의 상흔은 부러진 철로에, 미군 부대 막사에 긴장으로 묻어있어 둘러보는 이들을 처연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제 이 휴전마저도 종료되고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맞을 수 있을까.

 

몇 해 전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고, 남북미 정상도 한 자리에서 만난 적 있고 또 북미 정상도 두 번이나 만났지만 아직도 남북미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조속히 남북 대화와 북미접촉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오늘 찾아와서 돌아본 파주 문산 일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해를 향해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 강줄기는 무심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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